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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했지만 유엔은 변하지 못했다”

0427 zion 2023. 9. 21. 08:40

“세상은 변했지만 유엔은 변하지 못했다”

안보리 5국 중 4국 정상 빠져 ‘新냉전’

입력 2023.09.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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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19일(현지 시각)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하며 "유엔은 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세상은 변했지만 유엔은 변하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으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의 일부가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실제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19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 첫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자조 섞인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이어 “세상은 불안정해지고 있고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고 글로벌 도전 과제가 증가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발언에 “유엔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말”이라는 평가와 함께 “개혁의 선봉장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이 ‘유체이탈’ 화법을 선보인다”는 비판이 함께 나왔다.

이번 총회 참석자 면면을 봐도 유엔의 현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5국 중 미국을 제외한 4국 정상이 이번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미국과 대척점에 서 있는 중국과 러시아뿐만 아니라 우방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 정상도 오지 않은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번 주 파리를 찾는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일정 때문에 불참했다.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불참 이유조차 밝히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두 사람의 불참은 안보리가 더 이상 지정학적 문제를 다룰 만한 최고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러시아가 식량과 에너지 등으로 전세계를 협박하고 있다"고 했다. /연합뉴스

이날 축 처진 유엔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살려준 정상은 러시아와 전쟁 중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다. 지난해 총회에서 영상연설을 했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올해에는 직접 참석해 대면 연설로 “러시아가 전 세계를 상대로 ‘식량’과 ‘에너지’ 같은 생활필수품을 무기로 협박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등장과 퇴장 때 응원과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두 번째 순서로 등장해 최근 러시아와 무기 거래를 추진 중인 북한에 대해 “안보리 결의 위반을 이어가는 것을 규탄한다”고 했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러시아만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서 “평화를 가로막는 것은 러시아 뿐”이라고 했다.

 
 

반면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미국이 유럽 국가들을 약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폭력을 부채질하고 있다”며 총회 연설에서 미국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란이 미국과 수감자 5명씩을 맞교환하는 외교 이벤트를 벌인 지 하루 만에 공세를 편 것이다. 그는 2020년 미국이 드론 폭격으로 살해한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언급하며 “테러 행위에 개입한 이 정부(미국)의 모든 이에 대한 단죄를 마칠 때까지 쉬지 않겠다”고 했다.

"이란 여성에게 자유를" - 19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에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연설하는 동안 이란의 앙숙인 이스라엘의 길라드 에르단 유엔 주재 대사가 팻말을 들고 일어서 있다. 팻말에는 '이란 여성들은 지금 자유를 누려야 마땅하다'라는 문구와 지난해 9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간 뒤 의문사한 이란 여성 마흐사 아미니의 얼굴이 인쇄돼 있다. 왼쪽 아래 사진은 라이시 대통령이 연설 도중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 입을 맞추는 모습. /로이터 뉴스1

FT는 “이번 유엔 총회는 ‘신(新)냉전’ 기류 속에서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국제 평화와 협력 증진을 위해 설립된 유엔이 그 목적에 걸맞은 존재감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AP통신은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긴급조치를 비롯해 유엔이 2030년까지 이루기로 한 17개의 광범위한 목표가 있지만, 현재로서는 단 하나도 달성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했다. 개발도상국들의 극심한 빈곤과 기아를 해결하는 노력에도 앞장서야 하지만 눈에 띄는 성과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리더십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유엔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