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ns news

“한심한 아이디어”…명동 ‘버스대란’ 부른 대기판 9일만에 운영 중단

0427 zion 2024. 1. 6. 08:41

“한심한 아이디어”…명동 ‘버스대란’ 부른 대기판 9일만에 운영 중단

‘노선별 대기판’ 탓 시민 불편… 운영한지 9일 만에 중단키로

입력 2024.01.06. 03:00업데이트 2024.01.06. 07:49
 
 
 
31
 
 

서울시가 지난달 27일부터 중구 ‘명동입구’ 광역버스 정류장에 도입했던 ‘노선별 대기판’ 운영을 9일 만에 중단했다. 서울시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 안전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노선별 대기판을 설치했는데, 거꾸로 퇴근길 대혼잡이 빚어지면서 안전이 더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입구' 광역버스정류장 앞 인도가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다. 서울시가 지난달 27일 광역버스 노선 29개가 지나가는 이 정류장에 '노선별 대기판'13개를 설치하면서 극심한 혼잡이 발생했다. 시민들 불만이 쏟아지자 서울시는 5일 노선별 대기판 운영을 중단했다. /박상훈 기자

‘명동입구’ 정류장에는 서울 도심에서 경기도 성남, 용인, 수원, 화성, 의정부 등으로 가는 29개 노선의 광역버스가 선다. 이전에 이 정류장은 승객들이 정류장 바닥에 적힌 노선 번호를 보고 줄을 서 있다가 원하는 버스가 정차하면 탑승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승객이 많은 퇴근 시간에는 버스가 반드시 바닥의 노선 번호 앞에 서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새로 도입된 ‘노선별 대기판’ 제도는 버스가 노선 번호가 적힌 대기판 앞에만 정차하고 다른 곳에서는 승객을 일절 태우지 않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지난달 27일 ‘명동입구’ 정류장에 ‘노선별 대기판’ 13개를 약 1m 간격으로 세웠다. 비슷한 방향의 노선 2~3개를 묶어 버스의 정차 장소를 지정한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퇴근 시간대에 버스가 정류장 인근 도로나 횡단보도에서도 승객을 태우는 등 안전 문제가 우려된다는 민원이 많아 새 제도를 도입했다”고 했다.

그래픽=김하경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지난 4일 오후 6시쯤 이 정류장은 버스를 타려는 승객 1000여 명으로 가득 찼다. 사람이 오가기 힘들 정도였다. 버스를 기다리던 직장인 이모(30)씨는 “평소 5분 정도 기다리면 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이번 주 들어서는 30분씩 기다려도 잘 오지 않는다”며 “매일 퇴근 지옥이 따로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승객은 “서울역에서 명동입구까지 정류장 2개를 지나는 데 1시간이 걸린 것 같다”며 “이 일대가 완전 난장판이 됐다”고 했다. 경기 화성행 버스를 기다리던 조모(48)씨는 휴대폰으로 버스 운행 정보 앱을 보여줬다. 명동입구 정류장 주변에 버스 수십 대가 밀려 겹쳐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는지 한심할 따름”이라고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이전에는 여러 대의 버스가 정류장에 한꺼번에 정차해 승객을 태웠는데, 지정 정차 구역이 생기면서 앞 차가 빠져야만 다음 버스가 정차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선별 대기판’이 설치된 방식도 문제였다. 30~40m 길이의 정류장에 대기판 13개를 세우다 보니 대기판 사이 간격이 1m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정차 공간이 부족해 도로 상에 대기하는 버스가 생기고 교통 체증으로 이어졌다.

ADVERTISEMENT
 
 

결국 서울시는 5일 ‘노선별 대기판’ 운영 중단을 결정했다. 서울시는 이날 “대기판을 없애고 이달 말까지 유예 기간을 갖기로 했다”며 “국토교통부, 경기도 등과 협의해 일부 노선을 다른 정류장으로 옮겨 혼잡도를 낮춘 뒤 다시 시행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가 대기판 운영을 중단한 이날 저녁 ‘명동입구’ 정류장은 도로도, 인도도 혼잡이 개선된 모습이었다.

교통 전문가들은 “기존 정류장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적은 이해가 가지만, 이런 식으로 제도를 바꾸려면 시범 운영이나 시뮬레이션(모의 시험) 등을 거쳤어야 했다”면서 “탁상 행정의 전형”이라고 했다.

강경우 한양대 교통물류학과 교수는 “시민 상당수가 영문도 모른 채 퇴근길 버스 대란에 빠졌는데 승객들이 몰리는 사정과 안전, 교통의 흐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어야 한다”고 했다. 김주영 한국교통대학교 교통정책학과 교수는 “명동입구 정류장은 공간이 좁아 수용 가능한 버스 수가 특히 적은 곳인데, 이런 곳을 조밀하게 쪼개 놓으니 혼란이 가중된 것”이라며 “이런 곳에서는 오히려 유연성이 있는 기존 방식이 낫다”고 했다.

서울시와 버스 업계는 서울 중심부로 진입하는 광역버스의 노선을 조정해 ‘명동입구’ 같은 도심 정류장으로의 버스 유입량을 줄이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2022년 핼러윈 사고 이후 광역버스 입석 금지 조치가 강화되면서 국토교통부가 서울 도심에 들어오는 광역버스 수를 늘렸다”며 “정류장 시설은 그대로인데 버스 대수는 증가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김승준 서울연구원 도시교통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은 “서울 도심은 이미 수용 가능한 한계보다 더 많은 수의 광역버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퇴근 시간대(오후 5~9시) 명동입구 정류장에 정차하는 광역버스는 입석 금지 조치 전 499대에서 작년 말 558대로 59대(12%)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