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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희 “미8군 데뷔 무대서 난생 첫 기립박수… 노래 인생 ‘꽃밭’ 열렸죠”

by 0427 zion 2023. 9. 25.

정훈희 “미8군 데뷔 무대서 난생 첫 기립박수… 노래 인생 ‘꽃밭’ 열렸죠”

[한미 동맹 70년, 번영을 위한 동맹]
[2] 정훈희 “미8군 경험이 날 키워”

입력 2023.09.25. 03:26업데이트 2023.09.25.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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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정훈희가 남편 김태화와 함께 운영하는 부산 라이브 카페에서 포즈를 취했다. 반짝이 의상은 과거 미군 부대 등에서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 느낌을 재현한 것으로 그녀가 아끼는 스타일 중 하나다./김동환 기자

가수 정훈희(72)의 노래 인생은 미군에서 듣고 배운 음악이 바탕이 됐다. 아버지(정근수), 작은아버지(정근도), 오빠(정희택)가 모두 미 8군 무대에서 음악 활동을 했다. 남편(김태화)도 미 8군에서 록밴드 리드 보컬로 활동했다. 미8군(Eighth United States Army)은 미 육군 야전군의 하나로 한국에 주둔한 주한 미군 지상군을 말한다.

아버지는 1950년대 후반 부산에 주둔한 미군 부대(캠프 하이얼리아·Camp Hialeah)에서 피아노를 쳤다. 해방 이전 최대 음반사인 빅터 레코드 전속 가수였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늘 말했다. “이제는 미국 노래를 불러야 해. 더 큰 세상에서 놀아야 한다.” 한글을 깨칠 무렵 아버지는 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대여섯 살 때쯤이었을까? 아버지가 ‘ㄱ’을 써주시면서 ‘이게 기역인데, 기역의 영어 발음은 ‘G’라고 쓴다. 알겠제?’ 이런 식으로 한글과 알파벳을 동시에 배웠어요.”

어린 정훈희도 미국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뛰었다. AFKN(주한미군방송·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팝송을 익혔다. “AFKN 라디오에서 최신 미국 인기 가요 방송인 ‘아메리칸 톱 포티(American Top 40)’가 들리면 그렇게 마음이 설레는 거예요. 최신 팝송이 들리는 대로 우리말로 받아 적으며 따라 불렀어요. 아버지가 미군 부대 미국인들한테 원어 가사를 받아주시기도 했고요. 너무 재미있고 신기하니까, 영어로 말하고 쓰는 게 어렵다는 생각을 전혀 안 했어요.”

2023년 9월 16일 부산 기장군 가수 정훈희 씨가 남편 김태화 씨와 함께 운영 중인 라이브까페에서 포즈를 취했다./김동환 기자

작은아버지는 미 8군에서 활약한 밴드 마스터였다. 1967년 고교 1년생인 16세 정훈희가 가수로 데뷔할 수 있었던 건 작은아버지 덕분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서울 대형 나이트 클럽에서도 밴드 연주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방학 때 서울 남대문 그랜드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지요.” 어느 날 작곡가 이봉조가 클럽에 찾아왔다. 작은아버지 친구인 이봉조는 미 8군 무대서 색소폰을 불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봉조는 정훈희 노래가 끝나자 무대로 달려와 팝송을 불러보라고 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가 ‘문 리버(Moon River)’, 가수 패티 페이지 노래 ‘아이 웬트 투 유어 웨딩(I Went to Your Wedding·당신의 결혼식에 갔었어요)’을 불렀어요.” 노래를 듣고 이봉조가 말했다. “쬐깐한 게 참 노래 잘하네. 영어 발음도 좋고. 니 노래 어디서 배웠노?” 미 8군에서 음악하는 집안의 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미군 부대서 군생활을 한 큰오빠(정희택)는 1970년대 록밴드 히식스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로 활약했다.

이봉조가 작곡한 노래 ‘안개’로 가요계에 데뷔한 정훈희도 미군 무대에 여러 차례 섰다. 정작 첫 미군 무대에 선 때는 시기가 좀 늦었다. 데뷔 후 10년쯤 지난 1977년 군산 미 공군 부대 특설 무대에 초청받았다. 1960년대를 풍미한 백인 듀엣 라이처스 브러더스의 노래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를 불렀다. “Oh my love, my darling (오 내 사랑, 그대여) I’ve hungered for your touch(당신의 손길이 너무도 그리워요) A long lonely time(길고도 외로운 시간들).”

 
 

노래가 끝났는데 일순 침묵이 흘렀다. 이런 무반응은 처음이었다. 혹시 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마이크를 잡은 두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 “제가 무대에서 긴장 같은 건 잘 안 하거든요. 세계 가요제 무대에도 섰고, 서울 대형 나이트 클럽에서 미군들 앞에서도 노래 많이 했거든. 차라리 야유가 터지면 다행인데 그조차도 없이 조용하니까, 내가 일냈구나 생각했지요.” 그 순간이었다. 조용하던 관객들이 노래가 완전히 끝났다는 걸 확인했는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튿날 미 8군 신문에 정훈희 기사가 크게 실렸다.

1970년 도쿄 국제 가요제에 데뷔곡 ‘안개’(1967)로 출전한 정훈희. 톱 10에 올랐다./KTV

미 8군 무대에서 만났던 선배들도 기억한다. “미 8군 쇼 무대에 섰던 가수 오빠들이나 언니들을 보면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요. 요즘 TV에서 아이돌 데뷔 오디션 하지요? 그때도 오디션이 있어서 A, B, C 같은 등급을 매겼어요. 돌아가신 현미 언니를 비롯해, (윤)복희 언니, (윤)항기 오빠, (장)미화 언니 같은 사람들은 정말 인기 스타였어요.”

정훈희는 국제 가요제에서 통하는 가수로 성장했다. 1970년 도쿄 국제 가요제에서 ‘안개’로 ‘월드 베스트 10′에 입상했다. 1975년과 1978년 칠레 가요제에서는 각각 ‘무인도’와 ‘꽃밭에서’를 불러 최고 가수상을 품었다. 하지만 정훈희는 “해외 팬들 사이에서 인기는 남편이 먼저였다”며 웃었다. 남편 김태화는 하드록 그룹 ‘라스트 찬스’의 리드 보컬로 미 8군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어느 날 서울 시민회관 공연이 있어 갔는데 미국인들이 바글바글한 거예요. 꽃 들고 환호하며 가수를 기다리는데, 그게 바로 김태화였지. 미 8군 공연을 하니까 미군 가족, 친척, 친구들까지 팬이 된 거죠. 이미 미군 부대에서 한류가 있었던 거죠.”

정훈희는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데뷔곡 ‘안개’가 박찬욱 영화 ‘헤어질 결심’ OST(삽입곡)로 화제가 됐고, 노래 ‘무인도’가 최근 영화 ‘밀수’에 삽입됐다. 정훈희는 “동양적 정서에 서양 곡조를 더한 노래이기에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 힘을 갖는 것 같다”면서 “가수 정훈희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군 부대를 통해 배운 음악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