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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현장 없었다더니...‘고문 치사’ 이재명 측근, 직접 폭행·조사 지시

0427 zion 2023. 12. 27. 07:55

[단독] 현장 없었다더니...‘고문 치사’ 이재명 측근, 직접 폭행·조사 지시

정의찬씨 1·2·3심 판결문서 가담 드러나

입력 2023.12.27. 05:00업데이트 2023.12.27.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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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정무특보 정의찬(50)씨는 26년 전 ‘이종권씨 상해치사 사건’으로 자신이 징역 5년을 확정받은 일과 관련해 최근 “(사건) 현장에 없었고 지시한 적도 없었다” “강압 수사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2·3심 판결문을 보면 법원은 당시 정씨가 현장에 나타나 ‘조사’를 직접 지시하며 피해자를 때린 혐의를 일관되게 인정한 것으로 26일 나타났다.

이 사건은 지난 1997년 5월 27~28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산하 남총련(광주·전남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이던 정씨 등 운동권 대학생 6명이 피해자 이씨가 경찰 프락치인지 아닌지 조사한다며 온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이들 외에도 범인 도피 등 혐의로 다른 대학생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본지가 확보한 정씨 등 6명에 대한 판결문에 따르면, 정씨는 그해 5월 27일 오후 8시 20분 이후 전남대 1학생회관 내 남총련 임시 사무실에서 주먹으로 이씨의 뺨을 때리고 발로 옆구리를 걷어찬 뒤 공범들에게 “경찰 프락치 여부를 똑바로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정씨는 남총련 의장 겸 민족해방군 총대장이었고 다른 공범들은 남총련 위원 등이었다.

그래픽=양인성

정씨는 공범들이 이씨를 마구 때린 뒤 “경찰 프락치가 틀림없는 것 같다”고 보고하자 “더 자세하게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한 혐의도 받았다. 결국 이씨는 그해 5월 28일 오전 3시 10분쯤 늑골 골절과 다발성 좌상에 따른 외상성 쇼크로 숨졌다. 정씨의 상해치사 혐의는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유죄로 인정됐다.

특히 대법원은 “정씨는 1심 법정에서 검찰 조서를 읽어보고 추가하고 싶은 말을 자필로 기재한 후 서명 무인(拇印) 및 간인(間印)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면서 “고문, 폭행, 협박, 신체 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기망 등에 의해 임의성 없는 진술을 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강압 수사는 없었다는 것이다.

정의찬씨가 ‘이종권씨 상해치사 사건’으로 유죄를 확정받은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 2021년 8월이다.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가 정씨를 경기도 산하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 사무총장에 임명했는데, 사건 가담 사실이 드러나자 정씨는 4개월여 만에 사표를 냈다. 정씨는 지난 대선 때 이재명 캠프의 선거대책위 조직본부팀장을 맡았고 지난 8월 이 대표에게 정무특보 임명장을 받았다.

정씨는 내년 총선 출마를 준비하다가 최근 민주당 공천 예비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이종권씨 상해치사 사건이 다시 문제 된 것이다. 그러자 정씨는 지난 18일 페이스북에 “(당시 사건) 현장에 없었고 지시한 적도 없으나 강압적 수사로 더해지는 고통을 볼 수 없어 (남총련) 의장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며 “사면·복권을 받아 형 선고 효력 상실로 (공천) 부적격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썼다.

그러나 당시 검사로 사건을 수사한 양부남 민주당 법률위원장은 지난 21일 본지에 “강압 수사는 없었다. (정씨가 현장에 있었는지 등) 자세한 사건 내용은 판결문을 보면 알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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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확보한 판결문에 따르면, 정씨는 지난 1997년 5월 27~28일 이종권씨 치사 사건 현장인 ‘전남대 1학생회관 내 남총련 임시 사무실’에 있었다. 정씨 등 남총련 간부들은 1997년 5월 27일 오후 4시쯤 전남대에서 ‘미국 내정 간섭 분쇄 및 제14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위한 남북 공동투쟁 결의 대회’를 개최했다. 학생 참여도가 저조하자 남총련 간부들은 학생운동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남총련 임시 사무실에 모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날 오후 8시 20분쯤 A(당시 남총련 투쟁국 위원)씨가 “경찰 프락치 같은 놈이 있으니 데려다 조사해보자”고 했다. 이종권씨가 남총련 임시 사무실로 끌려왔고, 그 자리에서 정씨가 주먹으로 이씨 뺨을 때리고 발로 옆구리를 걷어찬 것으로 조사됐다. 정씨는 공범들에게 “경찰 프락치 여부를 똑바로 조사하라”고도 한 뒤 남총련 임시 사무실 옆에 있는 부총학생회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B(남총련 투쟁국 고문)씨와 C(전남대 5월대 죽창중대장)씨가 이씨에게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좋게 돌아가고 싶으면 바른대로 말해.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린다”고 했다. A씨와 D·E(남총련 정책위원)씨는 주먹과 구둣발로 이씨를 때리고 걷어찼다. 이들은 “경찰관에게 돈을 받고 학생 신분을 가장해 동아리에 가입하고 시위에 참여하며 학생운동 간부들의 동태를 살펴 그 정보를 경찰관에게 넘겨줬다”고 진술하라며 이씨를 계속 때렸다. 이씨는 당시 25세로 모 전문대 졸업생이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씨가 무릎을 꿇고 빌면서 “나는 그런 사람(경찰 프락치)이 아니니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구타는 멈추지 않았다. 공범들은 이씨의 두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구둣발로 무릎과 발등을 밟고 걷어찼으며, 이씨가 옆으로 나동그라지자 팔을 밟고 허벅지를 내리찍어 짓이겼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씨가 ‘추가 조사’를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범들이 이씨를 마구 때리다가 “확실히 경찰 프락치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고 보고하자 정씨가 “더 자세하게 보고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1997년 5월 28일 오전 3시 10분쯤 숨졌다.

정씨는 1997년 7월 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다. 상해치사,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 8가지가 적용됐다. 1998년 2월 광주지법 1심 재판에서 징역 6년과 자격정지 3년, 벌금 200만원이 선고됐다. 검찰의 신문 조서, 법원 공판 조서, 의사의 부검 감정서 등이 모두 증거로 인정됐다. 이어 광주고법은 같은 해 6월 항소심에서 징역 5년과 자격정지 3년,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정씨가 경찰 프락치인지 아닌지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자 남총련 간부들이 피해자를 조사하면서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을 인정하기에 넉넉하다”고 했다.

대법원은 1998년 9월 정씨에게 징역 5년과 자격정지 3년, 벌금 200만원을 확정했다. 나머지 공범 5명은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징역 4년과 자격정지 2년을 확정받았다.